저자 | 강수희, 엄지사진관, 김성주, 방멘, 곽민지, 리모
기획/공동제작 | 어반앤북(스튜디오연희)
출판사 | 방(ㅂang) | 2021.06.01
페이지 | 148
그래서, 서울
책소개
팬데믹 이전부터 로컬의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세계 유명 도시와 여행지를 여행하는 여행자가 아닌 일상을 살아가는 일상여행자가 나타났고, 국내 소도시는 물론 서울의 각 동네가 새로운 가치를 획득하고 있다. 로컬은 서울과 지역을 나누는 말이 아니다. 과거의 로컬은 농촌이나 시골을 의미했다면 지금의 로컬은 지역 밀착형의 삶과 일을 가지는 라이프스타일을 말한다.
『그래서』시리즈는 로컬에서의 소소한 일상 경험을 이야기하는 에세이집이다. 로컬의 서사를 만드는, 로컬의 서사를 발견하는, 로컬의 서사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래서』시리즈는 여행 가이드북이나 여행 에세이와는 다른 로컬 에세이를 지향한다. 단순한 여행지 소개나 감상, 감성적인 이야기가 아닌, 그 동네만의 분위기, 공간과 장소, 작가만의 에피소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시리즈의 첫 시작을 위해 6명의 작가가 모였다. 서울의 당인동, 도화동, 봉천동, 성수동, 연희동, 청량리에서 펼쳐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울』에서 6명 작가가 각기 다른 시선으로 써 내려간 6개의 이야기와 마주하며 수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이 도시 서울에서 머무는 이유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목차
- 콰야 – 내가 머무는 동네; 그래서, 당인동
- 김예지 – 그저 도화동이라는 이유로; 그래서, 도화동
- 여행자메이 – 미생의 여행지; 그래서, 봉천동
- 김상민 – 성수동에 삽니다; 그래서, 성수동
- 안유정 – 안녕, 나의 연희동; 그래서, 연희동
- 구선아 – 독립의 기억, 여행의 기억; 그래서, 청량리
책 속으로
당인동에서 지내면서 ‘로컬’이란 단어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과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어떤 한 분위기를 묵묵하게 이어가는 것은 대단하고 소중하다는 것. 어떤 것을 말했을 때 그것의 특정한 분위기가 머릿속에 떠오른다는 것 자체가 참 대단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기가 어려운 것을 알기 때문에 괜히 고맙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고. 내가 머물고 있는 동네, 같은 곳에 있어 주는 소중한 곳들에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
— 「내가 머무는 동네」 중에서
마음이 울렁이거나 말거나 동네는 여전했다. 도화동은 어제도 오늘도 별다른 일이 없어 보였다(큰길에 있던 카페가 문을 닫은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득한 불안감에 가슴이 텁텁할 때마다 동네를 산책했다. 쉽게 변하지 않은 존재에 대한,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만의 코스는 두 가지 정도다. 첫 번째는 사람 구경하고 싶을 때 도는 코스. 떡볶이집 앞에 줄이 얼마나 긴지 엿보는 것으로 시작되는 코스는갈매기 골목으로 이어진다.
— 「그저 도화동이라는 이유로」 중에서
나는 이 동네가 좋았다. 공인중개사 한다는 친구는 왜 하필 가파른 언덕 끝에 있는 불편한 집을 골랐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나는 나의 방이 언덕 끝, 산과 마주하고 있는 곳이라 더 좋았다. 창문을 열면 다른 건물이나 차도가 보이는 게 아니라, 산과 나무가 보였다. 봄에는 꽃이 피었고, 가을엔 나무 끝에 감이 열렸고, 새들은 수시로 찾아 들었다. 칠월과 팔월, 구월과 시월의 창 밖 그림이 매번 달랐다. 그래서 굳이 밖에 나가지 않아도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매일같이 느낄 수 있었다. 오래도록 여행하는 삶을 살겠다 다짐했는데, 굳이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책상 앞에 앉아 여행의 감성을 느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가성비 넘치는 여행자의 삶인가.
— 「미생의 여행지」 중에서
곧장 성수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예전 성수역에서의 어느 순간을 떠올렸다. 어느 날 집에 돌아가려 성수역 벤치에 앉아있는데 지하철역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성수는 역마저도 이상했다. 야외로 돌출되어 길게 뻗은 플랫폼 위로 출구가 마치 터널처럼 맨 앞과 뒤에만 뚫려있었다. 말그대로 중간이 없는 형태였다. 그런데 재밌게도 앞쪽인 1, 4번 출구에는 성수동 주민들의 거주공간과 공장지대가, 반대편 2번, 3번 출구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힙 플레이스로서의 성수동이 자리하고 있었다. 똑같은 성수지만 어떤 방향으로 나가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동네를 마주하는 셈이었다.
— 「성수동에 삽니다」 중에서
이 골목에는 다세대 주택이 몇 채 있는데, 우리 건물 이웃들끼리만 가깝게 지낸 건 아닌 것 같다. 하루는 옆 건물 다세대 주택에 사는 젊은 부부가 부부싸움 하는 소리에 잠이 깼다. 창문을 열어보니 그 건물에 사는 할머니와 아저씨가 나와서 중재하고 있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어디로 가려던 남편은 이들이 만류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었다. 부부싸움을 말리는 이웃이라…. 거의 볼 수 없던 광경이라 좀 신기했다. 이웃과의 관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연희동이다.
— 「안녕, 나의 연희동」 중에서
이때부터였을까. 청량리역 인근과 지하철 1호선은 유난히 고단한 삶을 사는 듯한 사람이 많이 보인다. 시장과 큰 역사를 관통하는 지하철 라인이라 그런지 오래된 지하철이라 그런지는 모르겠다. 미화할 수 없는 눈빛과 낯빛, 손등의 주름과 신발 위의 먼지. 노숙인, 판매상, 종교 전파자, 정신질환자 외에도 가난과 불행 사이에 끼어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오늘을 살아내는 사람들. 무표정이 아닌 고단한 표정의 사람들이다.
— 「독립의 기억, 여행의 기억」 중에서